겸손과 교만
“자기를 높이는 사람은 낮추어지고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여질 것이다”(마태 23,12)
여기서 ‘자기를 높인다’는 것은 교만을, 그리고 ‘자기를 낮춘다’는 것은 겸손을 뜻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교부들은 하느님께 나아가는 영적 여정을 흔히 사다리로 즐겨 표현하곤 합니다. 사다리의 한 단계 한 단계를 딛고 올라감으로써 마침내 하느님과의 일치에 이른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사다리에 비유해 볼 때, 그분이 제시하시는 사다리의 용도는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기 위한 것처럼 보입니다. 오늘 월피정 강론은 내려옴으로써 올라가는 이 별난 사다리, 이 역설적인 가르침을 주제로 함께 생각해 볼까 합니다.
자기를 낮춤, 곧 겸손은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흙’, 또는 ‘먼지’를 뜻하는 라틴어 humus에서 유래하였습니다. 따라서 겸손이란 흙에서 난 우리 인간 존재의 근원을 상기시켜줍니다. 우리가 늘 흙에서 왔다는 것을 생각할 때, 허영심이나 교만의 함정으로부터 조금 더 자유로워질 것입니다.
겸손은 그리스도교 영성 안에서, 특별히 수도영성 안에서 언제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해 왔습니다. 그래서 많은 교부들은 겸손을 덕들의 절정, 혹은 꽃이라 표현하고 있습니다. 베네딕도 성인에게 있어서도 겸손은 가장 중요한 덕목 가운데 하나입니다. 겸손에 대해 이야기하는 규칙서 제7장은 성인의 영적 가르침의 토대를 이루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러면 겸손이란 무엇입니까?
한 원로가 제자로부터 “겸손이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을 받고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겸손은 위대한 일이며 하느님의 일이네. 겸손의 길은 육체노동을 하는 것이고, 너 자신을 죄인으로 믿고 모두에게 종속시키는 것이지.” 그러자 제자가 “모두에게 종속된다는 것은 무슨 뜻인지요?” 하고 다시 물었습니다. 원로는 대답했습니다. “그것은 다른 사람들의 잘못이나 죄에 신경 쓰지 않고 항상 너 자신의 잘못과 죄에 주의를 기울이고 부단히 하느님께 기도하는 것이라네.”
겸손은 무엇보다 자기 자신을 늘 죄인으로 생각하고 하느님의 자비를 구하는 자세라는 것입니다. 성전에서 기도한 복음의 세리와 같은 자세입니다. 바리사이는 하느님 앞에 짐짓 자신의 의로움을 드러내었지만, 세리는 자신의 죄에 부끄러워 얼굴도 못 들고 하느님께 자비를 구하였습니다. 그는 “하느님, 이 죄인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루가 18,13)하고 기도했습니다. 결국 하느님께 받아들여진 기도는 바로 세리의 기도였습니다. 이처럼 하느님께서는 겸손한 자의 기도를 어여삐 받아주십니다.
7세기에 살았던 시리아의 이사악은 “겸손은 하느님의 옷”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겸손은 하느님과 자기 자신에 대한 인식에서 생겨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엄위하심과 우리 자신의 실상을 제대로 인식하고 있다면, 겸손해질 수밖에 없다고 봅니다. 이러한 인식은 더 이상 쉽게 남을 판단하고 단죄할 수 없게 합니다. 하느님과 자기 자신에 대한 그릇된 인식에서 교만이 생겨나고, 교만으로부터 바로 남에 대한 단죄가 생겨납니다. 이런 의미에서 겸손은 일차적으로 자신에 대한 솔직한 인정과 받아들임에서 시작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스스로를 불완전한 인간이며 죄인으로 의식하고 하느님의 자비에 희망을 두는 것입니다. 따라서 겸손은 비굴함이나 굴종, 또는 타성에 젖은 자기비하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볼 수 있습니다.
교만은 모든 악의 뿌리이며, 우리가 극복하기 가장 힘든 악덕 중의 악덕입니다. 그래서 교부들은 늘 교만의 덧에 걸릴까 두려워하여 경계를 게을리 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모든 공덕을 한 순간에 무너뜨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한 원로가 말했습니다.
“언제나 우월감과 허영심이 너를 움직인다. 네가 모든 계명을 준수했는지, 너의 원수들을 사랑하는지, 네가 스스로를 무익한 종이요 모든 이 가운데 가장 큰 죄인으로 생각하는지를 알아보기 위하여 너의 양심을 성찰하여라. 비록 네가 전적으로 옳았다 하더라도 대수롭게 생각하지 마라. 왜냐하면 그러한 생각은 모든 것을 파괴하기 때문이다.”
흔히 교만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장애를 유발한다고 합니다.
첫째, 청각장애입니다. 교만은 남의 말을 듣지 못하도록 합니다. 일방적으로 자기 말만 늘어놓고 자기 찬양 일색입니다. 한 마디로 모든 것이 일방통행식이어서 참된 대화를 불가능하게 합니다. 교만은 자기 자신에게 집착하게 합니다. 그래서 교만한 사람은 자기 안에 폐쇄되어 자기 성장의 기회를 상실하게 됩니다.
둘째, 시각장애입니다. 교만은 자신과 자기 밖의 모든 사물을 있는 그대로 단순하게 보지 못하게 합니다. 늘 남의 결점이나 잘못만이 눈에 들어옵니다. 그래서 편견과 선입견을 낳게 합니다.
셋째, 언어장애입니다. 교만은 남에 대한 칭찬에 인색합니다. 늘 남의 약점이나 단점만을 이야기합니다. 교만은 타인에게 무례하고 거친 말투와 감정적인 비방으로 언어의 폭력을 자행하게 합니다. 우리는 “내가 만약 다른 사람들을 향해 화살을 쏘면 나 자신도 과녁이 된다”는 말을 명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교부들에 의하면, 이러한 장애들을 극복하기 위한 가장 유효한 치료제는 바로 겸손입니다. 겸손은 자기 말 보다는 상대방의 말을 주의 깊게 경청하게 합니다. 그리고 사물을 편견 없이 있는 그대로 순수하게 바라보게 하며, 더 나아가 겉이 아니라 속을 볼 수 있는 눈을 갖게 합니다. 겸손은 또한 부드럽고 상냥한 말, 친절하고 호의적인 말로 상대방을 격려하고 키워주게 합니다.
실상 교만은 많은 경우 깊은 열등감의 발로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 약점과 열등감에 대한 일종의 방어기제와도 같습니다. 따라서 교만한 사람은 실은 깊은 열등감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입니다. 그의 인격은 천박하기 그지없습니다.
원로들은 다음과 같이 말하곤 했습니다. “우리가 스스로를 찬양할 때, 하느님께서는 우리에 대한 당신의 보호를 거두시며, 우리는 길을 잃게 된다.” 우리는 모두 나름의 결점과 한계를 지닌 부족한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이런 부족함은 오히려 하느님의 은총을 위한 준비이자 하나의 가능성이라 생각합니다. 부족함은 하나의 여백입니다. 우리 안에 그런 여백이 있을 때 하느님의 은총이 들어와 채워질 수 있을 것입니다.
겸손한 사람은 자신의 부족함과 나약함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그것을 구태여 숨기려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자비를 믿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부족함을 알기에 그는 언제나 배우려는 자세가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무한한 발전 가능성이 있습니다. 겸손한 사람은 또한 요란스럽지 않습니다. 그는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손이 모르게 소리 없이 조용히 선행을 실천합니다. 하느님이 다 아신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는 사람들의 평가나 칭찬에 연연하지 않습니다. 오로지 하느님의 마음에만 들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겸손한 사람은 늘 온유하고 친절하며 관대합니다. 그는 자신이 나약하고 부족한 것과 같이 다른 사람들도 그럴 수 있음을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겸손은 바로 그 사람의 내적 깊이와 됨됨이를 가늠하는 척도입니다. 무르익지 못한 사람들은 자기과시나 허세가 심합니다. 그래서 드러내고 떠벌이기를 좋아합니다. 내용물이 부실하면 외적인 포장에 신경 쓰기마련입니다. 얼굴이나 외모에 자신이 없는 사람들이 얼굴을 화장품으로 덧칠하고 사치스런 옷과 장신구로 몸뚱이를 혹사시키는 것과 같습니다. 마찬가지로 내실이 없는 단체나 공동체도 역시 화려하고 요란스런 외적인 사업이나 홍보에 치중하기 마련입니다. 성숙한 사람이나 튼튼한 공동체는 구태여 떠벌이고 치장하지 않아도 그 깊이와 가치가 저절로 드러날 것입니다. 안으로 알차게 익은 사람이나 공동체는 언제나 겸손합니다. 우리는 개인적으로도 공동체적으로도 늘 겸손해야 합니다. 우리가 겸손할 때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고, 우리를 통해 그분의 영광이 더욱 더 드러날 것입니다.
어느 날 압바 마카리우스가 종려나무 잎을 모아들고 습지에서 자기 독방으로 돌아가고 있었데, 악마가 낫으로 그를 공격하려했지만, 그렇게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소리쳤습니다. “마카리우스, 네가 가하는 큰 폭력 때문에 나는 고통을 당하고 있다. 왜냐하면 내가 너를 공격하려할 때, 나는 할 수 없기 때문이지. 그러나 나는 네가 하는 모든 것과 그보다 더한 것을 할 수 있지. 너는 지금 그리고 이후에도 단식하겠지만, 나는 결코 어떤 음식으로 원기를 회복하지 않지. 너는 자주 철야를 하지만, 나는 결코 잠들지 않지. 하지만, 나는 네가 오직 한 가지에 있어서만 나 보다 더 훌륭함을 인정하지.” 마카리우스가 “그것이 무엇인데?” 라며 그에게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가 “내가 너를 이길 수 없는 이유는 오로지 너의 겸손 때문이지” 라고 대답했습니다.
겸손은 하느님께 나아가는 가장 주요하고 효과적인 수단입니다. 우리는 교만으로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지고, 겸손으로 그분께 가까이 나아가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예수께서 제시하신 사다리의 어디에 서 있는지 성찰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여기서 ‘자기를 높인다’는 것은 교만을, 그리고 ‘자기를 낮춘다’는 것은 겸손을 뜻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교부들은 하느님께 나아가는 영적 여정을 흔히 사다리로 즐겨 표현하곤 합니다. 사다리의 한 단계 한 단계를 딛고 올라감으로써 마침내 하느님과의 일치에 이른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사다리에 비유해 볼 때, 그분이 제시하시는 사다리의 용도는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기 위한 것처럼 보입니다. 오늘 월피정 강론은 내려옴으로써 올라가는 이 별난 사다리, 이 역설적인 가르침을 주제로 함께 생각해 볼까 합니다.
자기를 낮춤, 곧 겸손은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흙’, 또는 ‘먼지’를 뜻하는 라틴어 humus에서 유래하였습니다. 따라서 겸손이란 흙에서 난 우리 인간 존재의 근원을 상기시켜줍니다. 우리가 늘 흙에서 왔다는 것을 생각할 때, 허영심이나 교만의 함정으로부터 조금 더 자유로워질 것입니다.
겸손은 그리스도교 영성 안에서, 특별히 수도영성 안에서 언제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해 왔습니다. 그래서 많은 교부들은 겸손을 덕들의 절정, 혹은 꽃이라 표현하고 있습니다. 베네딕도 성인에게 있어서도 겸손은 가장 중요한 덕목 가운데 하나입니다. 겸손에 대해 이야기하는 규칙서 제7장은 성인의 영적 가르침의 토대를 이루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러면 겸손이란 무엇입니까?
한 원로가 제자로부터 “겸손이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을 받고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겸손은 위대한 일이며 하느님의 일이네. 겸손의 길은 육체노동을 하는 것이고, 너 자신을 죄인으로 믿고 모두에게 종속시키는 것이지.” 그러자 제자가 “모두에게 종속된다는 것은 무슨 뜻인지요?” 하고 다시 물었습니다. 원로는 대답했습니다. “그것은 다른 사람들의 잘못이나 죄에 신경 쓰지 않고 항상 너 자신의 잘못과 죄에 주의를 기울이고 부단히 하느님께 기도하는 것이라네.”
겸손은 무엇보다 자기 자신을 늘 죄인으로 생각하고 하느님의 자비를 구하는 자세라는 것입니다. 성전에서 기도한 복음의 세리와 같은 자세입니다. 바리사이는 하느님 앞에 짐짓 자신의 의로움을 드러내었지만, 세리는 자신의 죄에 부끄러워 얼굴도 못 들고 하느님께 자비를 구하였습니다. 그는 “하느님, 이 죄인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루가 18,13)하고 기도했습니다. 결국 하느님께 받아들여진 기도는 바로 세리의 기도였습니다. 이처럼 하느님께서는 겸손한 자의 기도를 어여삐 받아주십니다.
7세기에 살았던 시리아의 이사악은 “겸손은 하느님의 옷”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겸손은 하느님과 자기 자신에 대한 인식에서 생겨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엄위하심과 우리 자신의 실상을 제대로 인식하고 있다면, 겸손해질 수밖에 없다고 봅니다. 이러한 인식은 더 이상 쉽게 남을 판단하고 단죄할 수 없게 합니다. 하느님과 자기 자신에 대한 그릇된 인식에서 교만이 생겨나고, 교만으로부터 바로 남에 대한 단죄가 생겨납니다. 이런 의미에서 겸손은 일차적으로 자신에 대한 솔직한 인정과 받아들임에서 시작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스스로를 불완전한 인간이며 죄인으로 의식하고 하느님의 자비에 희망을 두는 것입니다. 따라서 겸손은 비굴함이나 굴종, 또는 타성에 젖은 자기비하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볼 수 있습니다.
교만은 모든 악의 뿌리이며, 우리가 극복하기 가장 힘든 악덕 중의 악덕입니다. 그래서 교부들은 늘 교만의 덧에 걸릴까 두려워하여 경계를 게을리 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모든 공덕을 한 순간에 무너뜨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한 원로가 말했습니다.
“언제나 우월감과 허영심이 너를 움직인다. 네가 모든 계명을 준수했는지, 너의 원수들을 사랑하는지, 네가 스스로를 무익한 종이요 모든 이 가운데 가장 큰 죄인으로 생각하는지를 알아보기 위하여 너의 양심을 성찰하여라. 비록 네가 전적으로 옳았다 하더라도 대수롭게 생각하지 마라. 왜냐하면 그러한 생각은 모든 것을 파괴하기 때문이다.”
흔히 교만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장애를 유발한다고 합니다.
첫째, 청각장애입니다. 교만은 남의 말을 듣지 못하도록 합니다. 일방적으로 자기 말만 늘어놓고 자기 찬양 일색입니다. 한 마디로 모든 것이 일방통행식이어서 참된 대화를 불가능하게 합니다. 교만은 자기 자신에게 집착하게 합니다. 그래서 교만한 사람은 자기 안에 폐쇄되어 자기 성장의 기회를 상실하게 됩니다.
둘째, 시각장애입니다. 교만은 자신과 자기 밖의 모든 사물을 있는 그대로 단순하게 보지 못하게 합니다. 늘 남의 결점이나 잘못만이 눈에 들어옵니다. 그래서 편견과 선입견을 낳게 합니다.
셋째, 언어장애입니다. 교만은 남에 대한 칭찬에 인색합니다. 늘 남의 약점이나 단점만을 이야기합니다. 교만은 타인에게 무례하고 거친 말투와 감정적인 비방으로 언어의 폭력을 자행하게 합니다. 우리는 “내가 만약 다른 사람들을 향해 화살을 쏘면 나 자신도 과녁이 된다”는 말을 명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교부들에 의하면, 이러한 장애들을 극복하기 위한 가장 유효한 치료제는 바로 겸손입니다. 겸손은 자기 말 보다는 상대방의 말을 주의 깊게 경청하게 합니다. 그리고 사물을 편견 없이 있는 그대로 순수하게 바라보게 하며, 더 나아가 겉이 아니라 속을 볼 수 있는 눈을 갖게 합니다. 겸손은 또한 부드럽고 상냥한 말, 친절하고 호의적인 말로 상대방을 격려하고 키워주게 합니다.
실상 교만은 많은 경우 깊은 열등감의 발로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 약점과 열등감에 대한 일종의 방어기제와도 같습니다. 따라서 교만한 사람은 실은 깊은 열등감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입니다. 그의 인격은 천박하기 그지없습니다.
원로들은 다음과 같이 말하곤 했습니다. “우리가 스스로를 찬양할 때, 하느님께서는 우리에 대한 당신의 보호를 거두시며, 우리는 길을 잃게 된다.” 우리는 모두 나름의 결점과 한계를 지닌 부족한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이런 부족함은 오히려 하느님의 은총을 위한 준비이자 하나의 가능성이라 생각합니다. 부족함은 하나의 여백입니다. 우리 안에 그런 여백이 있을 때 하느님의 은총이 들어와 채워질 수 있을 것입니다.
겸손한 사람은 자신의 부족함과 나약함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그것을 구태여 숨기려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자비를 믿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부족함을 알기에 그는 언제나 배우려는 자세가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무한한 발전 가능성이 있습니다. 겸손한 사람은 또한 요란스럽지 않습니다. 그는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손이 모르게 소리 없이 조용히 선행을 실천합니다. 하느님이 다 아신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는 사람들의 평가나 칭찬에 연연하지 않습니다. 오로지 하느님의 마음에만 들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겸손한 사람은 늘 온유하고 친절하며 관대합니다. 그는 자신이 나약하고 부족한 것과 같이 다른 사람들도 그럴 수 있음을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겸손은 바로 그 사람의 내적 깊이와 됨됨이를 가늠하는 척도입니다. 무르익지 못한 사람들은 자기과시나 허세가 심합니다. 그래서 드러내고 떠벌이기를 좋아합니다. 내용물이 부실하면 외적인 포장에 신경 쓰기마련입니다. 얼굴이나 외모에 자신이 없는 사람들이 얼굴을 화장품으로 덧칠하고 사치스런 옷과 장신구로 몸뚱이를 혹사시키는 것과 같습니다. 마찬가지로 내실이 없는 단체나 공동체도 역시 화려하고 요란스런 외적인 사업이나 홍보에 치중하기 마련입니다. 성숙한 사람이나 튼튼한 공동체는 구태여 떠벌이고 치장하지 않아도 그 깊이와 가치가 저절로 드러날 것입니다. 안으로 알차게 익은 사람이나 공동체는 언제나 겸손합니다. 우리는 개인적으로도 공동체적으로도 늘 겸손해야 합니다. 우리가 겸손할 때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고, 우리를 통해 그분의 영광이 더욱 더 드러날 것입니다.
어느 날 압바 마카리우스가 종려나무 잎을 모아들고 습지에서 자기 독방으로 돌아가고 있었데, 악마가 낫으로 그를 공격하려했지만, 그렇게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소리쳤습니다. “마카리우스, 네가 가하는 큰 폭력 때문에 나는 고통을 당하고 있다. 왜냐하면 내가 너를 공격하려할 때, 나는 할 수 없기 때문이지. 그러나 나는 네가 하는 모든 것과 그보다 더한 것을 할 수 있지. 너는 지금 그리고 이후에도 단식하겠지만, 나는 결코 어떤 음식으로 원기를 회복하지 않지. 너는 자주 철야를 하지만, 나는 결코 잠들지 않지. 하지만, 나는 네가 오직 한 가지에 있어서만 나 보다 더 훌륭함을 인정하지.” 마카리우스가 “그것이 무엇인데?” 라며 그에게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가 “내가 너를 이길 수 없는 이유는 오로지 너의 겸손 때문이지” 라고 대답했습니다.
겸손은 하느님께 나아가는 가장 주요하고 효과적인 수단입니다. 우리는 교만으로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지고, 겸손으로 그분께 가까이 나아가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예수께서 제시하신 사다리의 어디에 서 있는지 성찰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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