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 이후 빨랫감-잭콘필드(이균형 옮김)
영적 생활의 진정한 일거리는 머나먼 어느곳이나 비범한 의식 상태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지금,여기'에 있다.
그것은 살면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지혜롭고, 공손하며 친절한 마음으로 받아 들이는 환영의 정신을 요구한다.
우리는 아름다움과 고난 앞에서도 '삶의 위기와 혼란 앞에서도 세상의 불의와 우리의 두려움 앞에서도 절을 올릴 수 있다.
이렇게 진실을 받드는 것이 자유에 이르는 길이다.
어떤 높은 이상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의 것' 앞에 절을 올리는 것이 쉬운 일만은 아니다.
하지만 아무리 어렵더라도 이것은 가장 쓸모있고 고귀한 훈련이다.
이 존재, 인간은 여인숙이다
아침마다 새로운 손님이 당도한다.
한번은 기쁨, 한번은 좌절,한번은 야비함
거기에, 약간의 찰나적 깨달음이
뜻밖의 손님처럼 찾아 온다.
그들을 맞아 즐거이 보시라.
그것이 그대의 집안을
장롱 하나 남김 없이 휩쓸어 가버리는
한 무리의 슬픔일지라도
한 분 한 분을 정성껏 모시라
그 손님은 뭔가 새로운 기쁨을 주기 위해
그대 내면을 비워 주려는 것인지도 모르는것.
암울한 생가, 부그러움, 울분, 이 모든것을
웃음으로 맞아
안으로 모셔들이라.
누가 찾아 오시든 감사하라
모두가 그대를 인도하러
저 너머에서 오신 분들이니.
-페르시아 의 신비주의 시인 루머
안정이란 십중팔구 미신이다
자연에는 그런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길게 보자면 위험을 피하는 것 보다는
차라리 그것에 맞서려고 하는 것이 더 안전하다.
삶이란'위험을 무릅쓴 모험'일 뿐, 그외에 그 아무 것도 아니다-헬렌켈러
우리는 복잡하고 산만하며 모순으로 가득찬 혼돈의 시대를 살고 있다.
영적 수행을 계속하려면 꾸준한 노력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어떤 구도의 길을 출발하여 맨 먼저 할 일은 마음의 소리를 들 수 있도록 자신을 충분히 침묵 시키는 일이다.
명상을 하든지,기도를 하든지,심상화 연습을 하든지.단식이나 노래를 하든지 간에, 일상의 역할과 분주한 습관에서 빠져 나올 필요가 있다.
모든 것을 수용 할 수 있는 마음의 넉넉한 자리를 회복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 내야만 하는 것이다.
모든 영적 여행은 닫힌 마음을 만드는 집착, 분노, 자만, 두려움, 불안, 의심등의 에너지를 더 이상 방치하지 말 것을 요구한다.
우리는 집착의 힘에 사로 잡힐때 마음이 닫히게 된다.
공허한 마음은 우리로 하여금 늘 지금 가진것 보다 더 많은 것을 원하게 만든다.
욕망의 손아귀나 비판의 소용돌이와 마찬가지로,
분노도 벗겨 낼 수 있는 마음의 비늘에 지나지 않는다.
스웨덴 옛말 이야기에서 공주와 용은 비늘을 하나하나 벗으며 진실한 자신을 드러낸다.
비늘을 벗을 수록 그들은 여유있고 부드러워진다.
진실을 가리고 있는 첫 번째 비늘과 가운이 벗겨지면,
우리는 분노와 비판과 집착으로 인해 위축되어 있는 그 밑에 무엇이 묻혀 있는지를 깨닫개 시작한다.
대게는 상처와 외로움과 두려움과 금심의 마음이 발견된다.
여기서 용기를 발휘해야만한다.
가장 큰 고통과, 가장 깊은 슬픔과 가장 어두운 두려움을 사랑으로 껴안을 수 있는 용기말이다.
그래서 이 과정에서 신뢰와 복종의 마음이 자라나기 시작한다.
이 다정하고 자비로운 혼의 깨어남이야말로 천사가 찾아 오는 것과도 같다.
용서의 에너지, 새로운 부드러움과 마음의 수용성이 여기서 나온다.
"깊은 울음을 울어 본 적이 없다면 아직 명상을 시작하지도 못한 것이다.
-아잔차 스님
좋은 수행법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얼마나 큰 상실감을 안고 있는지 이해하게하고, 그 감추어진 사연을 듣도록 하며 우리를 실켯 울 수 있게 해준다. 모두가 과거로 부터 놓여날 수 있게 해주기 위해서다.
슬픔이든 분노든 갈망이든 불안이든 간에,
마음을 닫히고 웅크리게 만든 것은 우리안의 '못다한 볼 일' 때문임을 알게 된다.
우리는 자신과 타인을 향해 마음을 닫게 만들었던 힘들과 다시 대면해야 한다.
갈등하고, 울지 못하고, 끝맺지 못한 일들은 우리가 주의를 보내는 즉시 그 모습을 드러낸다.
우리는 다른 누군가가 되기 위해, 또는 다른 어딘가에 도달하기 위해 마음이 얼마나 쉽사리 '지금여기'를
등져 버리리는지를 깨닫곤한다.
우리의 생각이 담긴 컵은 에고로 가득차서 더 이상 아무것도 들어갈 수 없다.
마음을 가라 않히려고 명상이나 기도에 정진할지니
우리는 우리의 삶이 얼마나 이 무의식적인 마음의 스토리에 좌지우지 되고 있는지를 새삼 깨닫게 된다.
좋은 수행법은 몸과 마음을 열어 주듯이 자기가
무의식 중에 연출하는 이런'스토리들'의 가면을 벗어내고 그 한정적인 생각들을 해체시키는 것이다.
우리는 낡은 껍질, 작은 자아의 느낌으로부터 빠져나와 지금의 현실로 발을 들여 놓는 방법을 배운다.
몸의 긴장을 풀고, 마음을 부드럽게 하고,무의식이 연출하는 해묵은 스토리들이 떨어져 나가게 하는 방법을 발견하는 것이다.
천진함과 열리 태도를 지니게 되면 우리는 그제야 비로소 세상을 단순하고 직접적으로 경험할 수 있게된다.
끊임 없는 내면의 지껄임으로 부터 빠져나와 '과거에 어떠했고. 장차 어떠 해야 한다' 거나 나는 어떠해야 한다.'라는 생각을
놓아 버려야 '우리는 영원한 현재'로 들어선다.
용서할 줄 아는 지혜로운 마음이 없으면 우리는 과거의 짐을 평생 지고 다녀야만 한다.
싫증이 나면 집착을 벗어 던지게 되고, 집착이 없어지면 자유로워 진다.
고통의 진상을 온전히 깨닫는 것이 고통의 문을 통해 자유로 가는 길이다.
세상은 그 자체가 고통과 기쁨의 씨줄과 날줄로 엮여있다.
이 진실을 거역하면 고통을 겪게 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