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우리의 신체는 에너지와 정보로 이루어져 있다.
과거의 패턴을 변형시키기 위해서는
그것이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지를 알아야만 한다.
우리의 몸은 분자와 원자로 쪼개어지는
고형의 물질로 이루어져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양자물리학은 모든 원자의 99.9999퍼센트가 텅 빈 공간이며,
실제로는 진동하는 에너지의 덩어리인 아원자 입자가
이 공간 속을 빛의 속도로 돌아다니고 있다고 말한다.
이 진동은 무작위적이고 의미 없는 것이 아니라 정보를 지니고 있다.
그리하여 한 덩어리의 진동은 수소 원자의 정보를 지니고,
또 다른 덩어리의 진동은 산소 원자의 정보를 지닌다.
사실 모든 원소들이 하나의 고유한 정보이다.
정보는 추상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궁극적으로는 우주와 그 속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추상적인 것이다. 인체의 물리적 구조를
궁극적인 근원으로 추적해 가면 분자가 원자로,
원자가 아원자 입자로, 아원자 입자는 텅 빈 공허 속으로
사라져 버리는 유령 같은 에너지로 꽁무니를 감추어 버려서
마침내는 막다른 골목에 부딪히게 된다.
신비스럽게도 이 공허에는 어떤 정보가 표현되기도 전에
이미 우리의 기억 속에 소리 없이 존재하는 것처럼,
양자의 장은 표현되지 않은 형태로 온 우주를 지니고 있다.
그것은 수십억의 은하계가 이 문장 끝의 마침표보다 수백만 배나
작은 공간 속에 압축되어 있었던
대폭발(Big Bang)의 순간 이래로 늘 그래 왔었다.
그러나 무한히 작은 그 점 이전에도 우주의 구조는
나타나지 않은 형태로 존재하고 있었다.
우리의 몸을 포함한 우주의 근본 질료는 비질료(non-stuff)이다.
그러나 그것은 범상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생각하는 비질료이다.
모든 원자 내부의 공허는 보이지 않는 지능으로 맥동하고 있다.
유전학자들은 이 지능이 본래 DNA 속에 들어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생각을 편하게 하기 위한 것일 뿐이다.
DNA가 정보화된 자신의 지능을 쌍둥이 격인 RNA에 전해 주고,
RNA는 나아가서 세포 속으로 들어가 수천 개의 효소들에게
그 지능의 조각들을 전달해 주고, 그러면 효소는
그 특정한 지능의 조각을 단백질을 만드는 데에 사용함으로써
생명이 전개된다. 이러한 과정의 모든 순간에
에너지와 정보가 교환되어야 하며,
이것이 없이는 생명 없는 물질로부터 생명이 생겨나지 않는다.
인체는 주로 글루코오스나 혈당의 형태로 세포에 전달되는
당분을 연소함으로써 에너지를 뽑아낸다.
글루코오스의 화학구조는 우리가 먹는 설탕인
자당(sucrose)과 매우 가깝다. 하지만 설탕을 태운다고 해서
복잡하고도 정교한 구조를 가진 살아있는
세포를 만들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시꺼먼 숯덩어리와 물과 이산화탄소의 흔적만이 남을 뿐이다.
물질대사는 단순한 연소과정 이상의 어떤 것이다.
각설탕 속에 비활성 상태로 들어 있는 당분이 그 에너지로써
생명을 지탱하는 것은 인체 세포가
그것에 새로운 정보를 불어넣기 때문이다.
당분은 그 에너지를 예컨대 신장, 심장,
혹은 뇌의 세포에 줄 수 있다.
이 세포들은 모두가 자신만의 독특한 형태의 지능을 지니고 있다.
심장세포의 율동적인 수축운동은 뇌세포의 전기적 방전작용이나
신장세포의 나트륨 교환 작용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이 지능의 풍부성과 다채로움은 놀라운 것이지만,
그 밑바닥에는 온 신체가 공유하고 있는 단일한 지능이 있다.
이 지능의 흐름이 우리를 살아 있게 하며,
사망의 순간에 이 흐름이 끊기면 우리의 DNA 속에 저장된
그 모든 지식도 쓸모없게 된다. 우리가 나이를 먹어 감에 따라
이 흐름은 다양한 방법으로 손상된다. 면역계통과 신경계통,
내분비계통의 특유한 지능이 모두 쇠퇴하기 시작한다.
생리학자들은 이 세 가지 계통이 인체의 가장 중요한 제어기능을
담당하고 있다고 말한다. 우리의 면역세포와 내분비선은 뉴런과
마찬가지로 뇌의 신호를 받아들이는 수용체(receptor)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확장된 뇌와도 같은 것이다. 그렇다면 노화란 단순히
우리의 잿빛 물질덩어리 속에 한정된
하나의 질병으로 볼 수가 없는 것이다.
면역계통이나 내분비계통의 지능이 상실되면
온몸의 노화가 진행되는 것이다.
이 모든 일이 보이지 않고 드러나지 않는 차원에서 일어나기 때문에,
말기 단계까지 진행되어 신체적인 증상으로 나타날 때까지도
그 손상은 눈에 띄지 않는다. 오감은 노화를 일으키는 수십억의
양자의 교환 작용을 느낄 수 있을 만큼 깊이 침투해 들어가지 못한다.
그 변화의 속도는 너무나 빠른 동시에 너무나 느리다.
각각의 화학반응이 일어나는 데에는 10,000분의 1초도
걸리지 않기 때문에 너무 빠르다는 것이며, 여러 해가 지나도록
그 누적된 효과가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너무 느리다는 것이다.
이러한 반응들에는 한 개의 원자보다
수백만 배 작은 규모의 정보와 에너지가 개입된다.
인체가 단순한 물질이라면 노화에 의한 쇠약을 불가피한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물질은 엔트로피(entropy), 즉 질서 있는 체계로부터
점점 무질서하게 되어 가는 경향성의 희생물이기 때문이다.
엔트로피는 대표적인 예를 들자면 폐차장에서
녹슬어 가는 고물차와 같은 것이다. 엔트로피는 잘 돌아가던
기계를 찌그러진 고물로 망가뜨려 놓는다.
이러한 과정은 결코 반대로는 일어나지 않는다.
녹슨 고철 무더기가 저절로 재조립되어
새 차로 만들어지지는 않는 것이다.
그러나 엔트로피의 법칙이 지능에까지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보이지 않는 부분은 세월의 약탈에 영향 받지 않는 것이다.
현대과학은 이 모든 것이 의미하는 것을 지금 막 밝혀내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오랜 세월 동안 신체의 젊음을 유지해 온 스승들의
영적인 전통 속에 이미 수천 년 동안 전해져 내려왔던 것이다.
인도와 중국, 일본, 그리고 그보다 좀 희귀하긴 하지만
서양의 기독교권에서도 자신의 진정한 본질이
지능의 한 흐름임을 깨달은 현자들을 배출해 왔다.
이 흐름을 유지하고 해가 갈수록 풍부하게 함으로써
그들은 자연계의 심층적 차원에서 엔트로피를 극복해 냈다.
인도에서는 이 지능의 흐름을
프라나(흔히 '생명력(氣)'으로 번역된다)라고 한다.
이것은 의지로써 증가시키거나 이곳저곳으로 움직일 수 있으며,
육신을 젊고 순조롭게 유지하도록 조종할 수 있다.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이 프라나를 접하고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은 우리 안에 있다.
요기(yogi)는 다름 아닌 의식의 집중을 이용하여
프라나를 움직인다. 심층적 차원에서 프라나와 의지의
집중은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생명은 의식이며 의식이 곧 생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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