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몹시도 끔찍한 꿈을 꾸었다.
구렁이만큼 큰 뱀이 한 순간에 딸아이 목을 휘익 감았다. 숨이 막힌 아이는 단숨에 쓰러진다. 이렇게 사진처럼 콕 박힌 장면이 현실이 되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침대가 들썩 거릴 정도로 추위에 떨고 나면 열이 사십 도를 넘나든다. 얼음물에 적신 수건으로 온몸을 닦아 열을 식힌다. CT촬영을 하기 위해 주사바늘을 꼽는데 혈관이 숨어서 스무 번을 넘게 찔러댄다. 장기간 입원으로 지친 아이는 꿈을 꾼 다음날 아침, 느닷없이 중얼 거린다. “ 죽었으면 좋겠어.” 그 후 꼭 일주일 뒤인 이천 삼년 시월의 마지막 밤이었다.
인공호흡기를 달고 작은 선들이 뒤엉켜 손조차 잡아 줄 수 없는 모습으로 그녀는 영원한 안식처로 떠났다. 혼자서 장사를 하며 힘들게 딸을 키우던 때였다. 폐렴 때문에 어이없게 딸을 잃었다. 의사 말로는 재수 없게도 아주 지독한 바이러스에 걸렸기 때문이란다. 나에게 삶은 왜 이리도 가혹할까. 이해할 수 없는 운명의 틈새에서 너무나 혼란스러웠다. 나도 이생의 남루한 옷을 벗고 싶었다.
비겁하게도 생명의 기본욕구가 있었던 걸까. 삶의 이유를 찾고 싶었던 걸까. 막상 지나온 세월을 되돌아보니 태어나서 내 뜻대로 내 삶을 살아본 적이 없었다. 세상에 보탬이 되게 이뤄 놓은 것도 없다. 지상에 온지 마흔 두 해, 그동안 허겁지겁 시간에 쫓겨서 내달아왔던 것이다.
급할 것 없다. 나 또한 마지막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가고 있다. 나에게 주어진 소중한 이생에서의 시간도 째깍 거리며 쉼 없이 가고 있다. 삶과 죽음은 아주 가까이 있다는 걸 피부로 느꼈다. 나머지 삶을 치열하게 살아봐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고, 그것이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해야 할 일이기도 했다.
요즘 세월호 사건으로 차가운 물속에 수장되어 죽음에 이른 아이들이 계속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남은 부모들은 생금 같은 자식을 잃고 그 비통함을 어찌 견디며 살까. 그 분들을 생각하니 가슴 저 밑바닥부터 저려 온다. 지금은 도저히 인정할 수도 없고, 그저 멍할 따름 일 것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잘 해주지 못한 죄책감이 머릿속에 똬리를 틀고 불면의 밤을 만들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은, 남은 사람들의 살날을 마구 헝클어 놓는다.
내 너를 다시는 모른다 하리
꼴 백번 너의 이름 지워도
새벽이 오기 전
선명히 떠오르는 그 이름
난
너를 모른다 하리.
국화꽃 한 송이 따라
강물이 흐르고
너의 모습은 더욱 또렷하게
내 가슴속을 파고드는데
난
또다시 그 이름을 지운다.
미안하다
난 너를 모른다 하리.
딸을 보내고 몇 년 뒤 일기장에 쓴 내용이다. 나는 아이와 함께한 십삼 년을 다시 만날 때 까지 고이 접어 두기로 했다. 이처럼 글로 쓰며 각인 시키는 일기의 마력은 놀라웠고, 내가 원하던 걸 쓰면 그대로 울림이 왔다.
우연한 기회에 심리상담사 공부를 시작하게 되었다. 학교에서 젊은 친구들과 어울려 공부를 하면서 상처를 쓸어안을 수 있었다. 독서지도사와 미술치료사 공부도 했다. 그렇게 조금씩 나를 보듬어가며 세상 속으로 발을 들여 놓았다. 건드리면 금방이라도 왈칵 터질 것 같았던 눈물도 줄어들었다.
“생명이 오고 가는 것은 계절이 바뀌는 것만큼, 자연스런 현상이고 앞서고 뒤서는 것 역시 꽃이 조금 일찍 지고 늦게 지는 것쯤으로 받아들여야 된다. ” 는 글도 위안이 되었다. 차츰 내 잘못으로 자식을 잃었다는 죄책감을 떨쳐나갔다. 그동안 가족들에게도 파편을 입에 물고 내 뱉는 것처럼 독한 말들을 쏟아 내던 것도 자제하게 되었고, 서로가 다 마음이 아픈 환자임을 인식하게 되었다.
“상처를 입어도 그 영혼의 깊이를 잃지 않는 자를 사랑 한다” 는 니체의 글은 좌우명처럼 책상 앞에 붙여졌다.
누구나 살다보면 치명적인 삶의 소용돌이에 휘말릴 수 있다. 그때 상처를 잘 극복고자 노력하지 않으면 쓰러지고 만다. 사람들은 남의 일에 대해서는 객관적으로 잘 보고 조언도 쉽게 한다. 그런데 내가 겪게 되면 감정을 다스리기 힘들고, 판단도 흐려지고, 될 대로 되라는 식이 된다. 고통을 통해 인생을 깨달으면 단단한 길로 접어들 수 있게 된다. 나의 이야기가 넓고 깊게 새로 만들어 지는 것이다.
자식의 죽음은 누구의 어떤 말로도 위안이 될 수 없다. 내가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차피 자신이 감당해야 할 몫이다. 이렇게 자신을 추스르는 일이 결코 쉽지 않다는 걸 안다. 그래도 노력해야 한다. 나 또한 십 년 세월이 가고 나서야 맘의 여유를 찾을 수 있었고, 세심하게 되돌아보니 나를 방치한 많은 날들이 보였다. 그러나 유가족은 자신을 너무 오랜 시간 내팽개치지 말았으면 좋겠다.
딸아이 생각은 마음 속 깊숙이 있다가 세상사 요즘처럼 시끄러울 땐 우물에 돌 던지듯 파장이 인다. 언젠가 딸을 만나는 그날,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너 떠난 후 엄마는 하고 싶었던 일 다 이루고 왔노라’ 고. 그래서 나의 발걸음은 늘 바쁘다.
이제 유가족도 쉽지 않겠지만 지나간 것은 놓고, 하루빨리 가슴앓이를 멈추고 자기 삶으로 돌아 올 수 있길 바란다.
이 되새김한 한 가닥의 나의 슬픔이 그들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줄일 수 있다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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